1학년을 동대신동 언덕 판자촌에서 지내다가 2학년 때에는
서대신동파출소 뒷집으로 옮겼다.
수산센터 하감독님 댁 3간 함석집 부엌방이 내 보금자리였다.
그 댁에는 나와 동학년인 부산여상 다니던 따님이 있었으니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냈다.
다정하게 말 한 마디 나누지 않은 것은 나에게는 여자 친구가
있었으므로 내가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고 그녀도 시골 출신 자취생에게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내방 맞은 편 앞집에는 부산여고 다니던 여학생 공부방이
있어서 항상 몸가짐을 조심해야 했다.
그녀는 내 재종 여동생과 동급생이었다.
사범학교에 입학한 후로 나는 마산여고 다니던 초.중학교
동기생이었던 지금의 내자와
편지를 주고 받으면서 우정에서 사랑으로 옮겨 가고 있었다.
처음에는 겁도 없이 마산여고로
편지를 보냈으나 그 다음부터는 마산 후배네 집 주소로 보냈다.
1 주일에 한 장 씩은 보냈으니까 그 때 우표값만 해도
적지 않은 돈이었으리라.
2학년 때에 내 보호자였던 형님이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하였다.
그 때부터 나도 학비를
걱정해야 했으므로 가정교사 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서대신동 지인의 외동 아들을 가르쳤다.
그러다가 공설 운동징 뒤에 살던 부산일보
기자댁의 아이를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 당시 사범학교 학생들은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않으면서
공부를 잘하는 편이었으므로 가정교사
일을 많이 하였다.
자취방 방세는 형님이 부담하고 쌀과 반찬은 고향 집에서 가져다 먹었다.
단팥죽을 너무 좋아하여 길 건너 단팥죽 집에서 밥 대신 단팥죽을
사 먹을 때가 많았다.
그래서 내 별명이 '단팥죽 총각'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아침밥을 하기 싫으면 등굣길에 동대신동 시장에서 국수를
사 먹는 날도 더러 있었다.
앞으로 교사가 될 사범학교 학생으로 공부 뿐 아니라 행동에도
늘 모범적안 학생이었다.
그런 걸 보아내지 못하는 동급생도 있었다. 그래서 두 번이나
아무 이유 없이 그 친구에게
불려가서 구타를 당할 직전에 누군가가 태권도를 하던
다른 친구에게 연락을 하여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 사범학교 학생으로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행동을 하는 그 친구는
교직에 조금 있다가 보통고시에 합격하여 수산청 고위
공무원으로 퇴임히였다.
수안보에서 전국 동기회를 할 때에 그 친구가 나에게
늦었지만 사과를 하였었다.
그 자신을 그런 사실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다른 친구에게 그 사실을 듣고 그 때 정말
미안했었다고 사과한 것이었다.
'이런 일 저런 생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리일락 향기 (0) | 2017.04.20 |
---|---|
물에 잠긴 아버지 (0) | 2017.04.17 |
복숭아꽃 살구꽃 (0) | 2017.04.12 |
의사는 자신이 암에 걸리면 어떤 치료를 할까 (0) | 2017.04.12 |
진해 군항제 끝났다 (0) | 2017.0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