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를 1등으로 졸업하였으나 6.25사변 후의 피폐하였던
가정 사정으로
중학교 진학이 어렵게 되었다.
농사를 짓던 형님들 세 분이 모두 군에 입대하여
농토도 그렇게 많은 편도 아닌데에도 머슴을 데려야
농시를 지을 수 있게 되었으므로 내 바로 위의 형은
중학교를 중퇴하고 나도 집에서
농삿일을 거들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자 6학년 담임선생님이 가정방문을 오셔서
꼭 진학을 시켜야 한다고 아버지를
설득하시고, 그 당시 중학교 교장선생님께서도 인재를
놀려서는 안 된다는 취지로
아버지를 설득하셨다고 한다.
우여곡절 끝에 입학원서를 내게 되었으나
국가 시험 점수가 나보다 앞선 학생이
한 사람 더 있어서 수석 입학의 기회를 얻지는 못하였다.
(그 친구는 이웃 작은 학교 출신이었다.)
내가 입학한 중학교는 한 학년 2학급의 사립중학교였다.
6.25 전쟁으로 교사가 불타고
그 당시 선배들이 산에 가서 나무를 베어 와서 임시로
지은 가교사에서 공부를 하였다.
의령군 동부 지역 6개면의 초등학교 출신들과 전쟁 후
여러가지 형편으로 진학
하지 못하고 있던 늦깎이 입학생들이 함께 공부를 하던
시절이어서 동학년이라도
나이 차가 서너살이나 많은 학생도 있었고 자형과 처남이
함께 다니던 친구도 있었다.
동부지구의 중심지인 가장 큰 학교의 대표격이었던
내가 중학교에서도 대표가
될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웃 소규모 학교 출신들 중에도 수재들이 많아서
재학 3년동안 치열한 경쟁을 하면서
선두를 다투었다.
그 당시에는 과도기였으므로 학교 선생님들도 정규 자격증을
가진 분은 수학선생님과
지리를 가르쳤던 교감 선생님 두 분 뿐이었고, 그 나머지 분들은 초등학교에
계시던 분들과 이웃 읍내에서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분들과
대학을 중퇴하거나
졸업을 했어도 교사자격증을 가지지 않은 분들이었다.
그래도 그 분들은 정말 열심히 가르쳤으므로
졸업생들 중에는 명문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사람이 꽤 있었다.
2학년 때부터는 교장선생님이 학교를 그만 두셔서 교감 선생님이
직무대행을 하셨다.
1학년 때였다. 학교 옆 소나무 숲에서 야외학습을 하던 때였다.
생물을 가르치던
선생님께서 장래 희망을 발표하라고 하시었는데,
내가 손을 들고 나는 "초등학교
교사가 되어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고 하였다.
어릴 적부터 내가 늘 생각하고 있던 장래 희망이 결국
중학교를거쳐 사범학교로 진학하여 교단에서 평생 봉직하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내가 다니던 학교는 A 반은 늘 남학생반이었고,
B반은 남녀 공학반이었다. 여학생은 모두 11명.
기준이 무엇이었는지 모르지만 나는 3년 동안 늘 B반이었다.
지금의 내 반려자도 그 당시 같은 반에서 공부를 한 여학생 대표였다.
우리는 졸업 후 외지로 고등학교 진학을 하게 되었다.
반 정도가 진학을 하게 된 같은데
여학생은 세 사람 분이었다.
나는 대학을 갈 형편도 아니었고 장래 희망이 교사였으며,
사범학교는 국립학교로
장학금 보조가 있는데다가 졸업하면 교사로 바로 발령을 받을 수 있었므로
부산사범학교로 진학을 하려고 하였다.
동기들 중에 3사람이 같이 원서를 내었고
경남중학교 다니던 내 친구도 같이 응시하였다.
그 때 부산사범학교 입학경쟁률이 13대 1인가 그렇게 높았다.
최종 합격은 나 혼자였다.
모교 게시판에 힙격 소식이 붙기도 할 만큼 자랑스럽게 여겼던 것 같다.
내가 더 가까운 지방의 사범학교로 가지 않은 것은
그 당시 내 형님이 부산에서 취업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졸업한 신반중학교는 그 후에 공립중학교가 되었고
그 당시 은사님들도 모두
자격을 얻어서 공립중학교에서 근무하신 분이 많으셨다.
부산여고에서 수학교사로 근무하셨던 김병채 선생님, 의령중학교 교장으로
퇴임하신 박희구 선생님, 서울로 가셔서 대학교 교수로, 한글학회회장으로
활동하신 김승곤 박사님도 그 당시 우리를 가르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