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
내 아명은 '점덕'이었다.
작고 희미한 점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하여 '점덕'이라 불렀고,
어렸을 때에는 너무 숫기가 없고 얌전하여 '암덕'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날 때부터 사람 노릇 하기가 어려울 거라고 할만큼 약하고 힘이 없는
아이였는데 초등학교에 들어가서부터 공부를 잘하여 얻은 별명이
'녹두장군'이었다. 집안 어른들이나 마을 어른들이 내 본명(재순)보다는
아명이나 별명으로 나를 많이 불렀던 것 같다.
몸도 약하고 통학 거리도 멀고 하여 2년이나 늦게 입학을 하고
저학년 때에는 결석도 자주 하였으며,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에도 매우 소극적이고 용맹하지도 못하였다.
그러다가 초등학교3, 4힉년 때부터 공부에 두각을 나타내어 선생님들의
사랑을 받게 되니 친구들도 나를 무시하지 못하게 된 것 같기도 하다.
3학년 때에 담임선생님께서 화가 나셔서 교무실로 가 버리셨는데 그 대
교무실로 찾아가 선생님께 우리가 잘못했다고 빌었던 기억이 나는데
왜 내가 대표로 교무실로 갔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6학년 때에 반장과 전교회장으로 임명되어 활동한 것은 지금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다. 내자는 전교부회장이었다.
별로 잘나지도 많으면서도 언제나 당당하게
살아가는 내 정채성은 그 당시에 전교 1등과 전교회장을
했다는 자긍심이 내 정신세계를 붙들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 이전까지는 주로 면소재지에서 잘 사는 집 아이들 중에서
빈장을 임명하였지만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그러지 아니하고 공부를 제일 잘하는
나를 반장으로 임명하였던 것이다.
오래 전에 고인이 되신 박호진 선생님께서는 나에게는
잊지 못할 은사님이시다.
반장을 하면서 전교 회장으로 까지 발전하여 전교 어린이회를 주관하고
전교 조례 때에는 전교 학생의 앞에 서서 전교 학생들을 지휘하게 하셨다.
10리나 떨어진 산골 마을에 사는 나를 단간방에 부부가 거처하는 방에
나를 재우면서 밥도 공짜로 먹이셨다. 야간에 유지댁 아이들을 데리고
무료 밤 과외를 하였는데 거기에 참여시키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에 같이 공부를 한 친구들 중에는 경남중학교와
대구 계성 중학교로 진학한 친구도 있고
여학생 한 사람은 지금의 우리집 사람이다.
그러다가 우체국장님 댁에 기거하면서 내 동기와 같이
공부하도록 주선해 주셨다.
공짜로 먹고 자면서 그 친구가 공부를 잘하도록 도와주는
일종의 공부파트너였다.
그 친구는 대구 계성중학교로 진학한 후에 서울대학교를 졸업하였다.
내가 4학년일 때 6.25 동란이 일어났다. 학교가 전소되고 그 불 탄 자리에
가마니를 깔고 전시 임시교과서로 공부를 하고, 겨울에는 마을 재실을 돌면서
공부를 하다가, 나중에는 초가 3간집 임시교사를 지어서 졸업할 때까지
거기에서 공부를 하였는데 책걸상도 부교로 사용하던 긴 널판지 같은 것으로
하고 나무를 걸쳐 만든 의자에 앉아서 공부를 하였다.
졸업 전에 중학교 입학을 위한 국가 시험이 있었다.
담임선생님은 군내 1등을 바라보고
나를 특별히 공부를 시켰지만 결과는 400점 만점에 386점을
얻어 우리학교에서는
가장 좋은 성적이었지만 군내 1등은 하지 못하였다.
시험 보러 가는 날 생후 처음으로 버스를 탔는데 멀미를 많이
한 것이 나쁜 영향을
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하였다.
지금의 내자인 내 여자동기는 군내 여학생 중 1등을 하였다.
졸업하는 날 우등상과 개근상과 교육감상을 수상하였다.